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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이야기들

쿼런틴(quarantine) 뜻 과 유래 그리고 흑사병 3편

앞선 두개의 포스팅에서는 쿼런틴(quarantine)의 뜻과 유래 그리고 흑사병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흑사병은 19세기 말 파스퇴르에 의해 세균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혀 온 전염병 입니다. 그 중에서 3차례에 걸쳐 크게 유행한 적이 있는데요 이를 대역병 또는 범유행 이라고도 부릅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잘 알려진 팬데믹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1차대역병은 서기 541년 경 발생해서 약 200 여년간 유행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동로마제국 까지 퍼져나갔는데요, 당시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이름을 따 유스티니아누스역병 이라고도 불립니다.

3차대역병은 19세기 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를 기점으로 약 50년 동안 페스트가 대대적으로 유행한 것을 이릅니다. 이 때 약 1200만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보통 가장 많이 알려진 14세기 유럽의 페스트 창궐은 2차대역병 입니다. 이 포스팅은 쿼런틴이란 말이 탄생한 중세유럽의 2차대역병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4세기 유럽 흑사병의 시작과 전염경로

중세유럽에서 흑사병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파되었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 되었다는 설, 인도에서 시작되어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몽골 지배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 및 해상교역로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설 입니다. 이 설에 따른 전파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몽골의 크림반도 침공

1347년 몽골제국의 킵차크칸국은 흑해연안 크림반도의 카파(지금의 페오도시야)를 포위 공격중이었습니다. 당시 카파는 제노바의 식민도시이자 상업적 거점이었습니다. 몽골군의 침공으로 제노바시민과 몽골군 사이에 공성전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이 때 몽골군이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전투후 카파 시내에서는 대역병의 시작을 알리는 감염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의배(Death Ships) 사건

1347년 10월 경, 흑해에서 출발한 12척의 제노바 상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에 도착합니다. 선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배에 올랐던 메시나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선단의 선원들 대부분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며 살아있는 사람들도 온 몸을 광범위하게 뒤덮은 고름과 검은 부종으로 죽어가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칠리아 당국을 해당 선단의 즉시 출항을 명령하였으나, 선단이 떠난 뒤 메시나의 주민들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여 죽어나가게 됩니다. 이 후 역병을 삽시간에 시칠리아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메시나 사람들이 이탈리아 각지로 이동하면서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 에서도 감염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유럽대륙으로의 전파

1347년 연말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흑사병 감염이 보고됩니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하나 실패로 돌아가고 이듬해인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감염자가 발생하게 되며 이어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영국에서도 1348년 웨이머스(Weymouth)항에서 감염자가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수 개월 뒤에는 런던을 거쳐 스코틀랜드까지 전파가 됩니다. 1350년에는 북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 감염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유행은 1351년 수천만명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잠잠해 지기 시작합니다.

<영국 웨이머스항에 있는 흑사병 동판>

 

이상이 대략적인 많이 알려진 유럽의 흑사병 감염 및 전파 경로인데요, 여기서는 1347년 킵차크칸국의 카파 공격을 흑사병 유행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 하지만 이것과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몽골군의 공격이 흑사병의 감염 확산에 한 원이이 되긴했겠지만, 1346년에 흑해 크림반도 연안에는 이미 흑사병 퍼져 있었다는 것 입니다.

10~14세기 사이 유럽은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12~13세기에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시대의 도로들이 빠르게 복구 되어 교통도 발달하게 됩니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위축되었던 상업도시들이 복구 되면서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실크로드 및 해상교역로를 통한 동서간의 교역은 중앙아시아의 흑사병이 서양으로 전파되기에 이미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다녀왔던 군인들이 귀향 하면서 한센씨병(나병)과 흑사병을 같이 얻어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늘어난 인구와 주요 도시들의 발달로 인한 높은 인구 밀도, 교통망의 발달로 인한 빈번한 왕래에 더해 지금 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위생관념이 흑사병의 대유행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한 중세 유럽의 인적 피해

흑사병의 유행으로 중세 14세기 유럽이 얼마나 많은 인적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우선 인구조사가 정확히 이루어지던 시절이 아니라 총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에 대한 기록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럽 인구의 약 30%를 잃은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고 40%~50%로 추산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보다 높게 60% 이상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인적 피해도 적게는 2,000만 에서 많게는 2억명까지 추산하기도 합니다.

 

 

흑사병이 중세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

흑사병의 대유행 지나간 1350년대 유럽은 매우 음울한 분위기 였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문화전반에 걸쳐 염세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게 됩니다. 한동안 여행은 금기시 되고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은 흑사병의 참혹한 현실과 공포들을 그림으로 남기게 됩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있는데요 이 작품에서도 흑사병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후에 데 상크티스(1817-1883, 이탈리아의 문학자.문예비평가)는 데카메론을 두고 중세의 교회와 봉건제도를 조소하는 신흥 부루주아지 사회의 승리의 기록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이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유대인들은 율법상의 이유로 손을 자주 씻는데 이것이 위생에 도움이 되어 흑사병에 걸리는 확률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크게 낮았습니다. 이는 반대로 유럽인들에게 유대인들이 병을 퍼뜨리는 것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도는 계기가 되어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는등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하게 됩니다.

흑사병은 교육과 학문에도 큰 피해를 남깁니다. 교수와 학생수의 급격한 감소로 많은 대학들이 폐교를 하거나 수년간 휴교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국제어와 교회의 언어로 사용되던 라틴어의 사용자 수도 감소시켜 각국은 새롭게 자국의 언어로 성경과 문학작품들을 출간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국언어의 발달은 국민문학과 국민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계기가 됩니다.

흑사병은 경제질서와 중세적 세계관의 몰락을 앞당기는 역할도 합니다. 급격한 인구의 감소는 농민을 포함한 노동 인구의 감소를 불러왔고 노동 인구가 감소하자 임금이 치솟게 됩니다. 또한 인구의 감소는 곡물 소비량의 감소로 이어집니다. 토지로 부터 나오는 수익에 크게 의존하던 영주들은 높은 임금과 수익 하락 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숙련공은 감소하고 상업 및 교역은 마비되자 생필품의 가격은 폭등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영주와 농민 모두에게 타격을 주게 되는데요 후에 영주들은 이 어려움을 각종 봉건조세와 부과금을 통해 모조리 농민들에게 전가합니다. 이러한 영주들의 압박은 14세기 유럽 곳곳에서 농민반란을 불러오게 됩니다.

중세유럽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교회는 흑사병으로 부터 신도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수도원에서의 집단 생활로 성직자의 사망률은 무척 높았습니다. 교회는 이제 권위도 잃고 신도도 잃고 성직자 자체도 잃어 버린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그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다 보니 이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는 다중상속자도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중상속을 받다보니 갑자기 부유해진 이른바 졸부들도 많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이들이 겉치장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패션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